윤성호 감독에 관해 대화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영화관에 없는 영화감독” 물론 이는 윤성호가 ‘독립영화’ 씬에서 활동하던 시기를 알지 못하던 사람의 첫인상에 가깝다. <대세는 백합>(2015)나 <게임회사 여직원들>(2016) 등의 웹드라마로 그의 이름을 처음 접했기 때문이다. 커리어 초기의 인터뷰에서 윤성호 감독은 비슷한 말을 했었다. “나는 독립영화감독이기 이전에 영화감독이 아니다. 나는 VJ, 비디오 저널리스트인 것 같다. 영화감독이라고 불리기는 부끄럽다. … 그저 내 영상물을 비디오 저널 또는 비디오 에세이라 생각하고 공감해주면 좋겠다.”¹⁾ 그의 말이 보여주듯 윤성호 감독의 초기작은 전형적인 영화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그는 데뷔작인 <삼천포 가는 길>(2001)부터 <나는 내가 의천검을 쥔 것처럼>(2004)에 이르는 짧은 기간 동안 두 편의 옴니버스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7편의 단편영화를 생산했다. 어떤 작품은 온라인상에서 그 흔적을 찾아보기도 어렵지만²⁾, 그의 다른 작품들을 보며 어떤 형태의 작품일지 상상해볼 수는 있겠다.
독립영화이지만 독립영화는 아닌
관람할 수 있는 다섯 작품³⁾은 윤성호의 “비디오 저널리스트”적인 면모가 돋보인다. 이들 영화는 극영화도 다큐멘터리도 아니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어떤 이야기는 존재하지만 그것을 중심으로 영화가 진행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이야기를 위해 수많은 샛길을 경유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삼천포 가는 길>을 살펴보자. 20대 중반이 되도록 성 경험이 없는 초등학교 동창 ‘구보’와 ‘시목’이 첫 경험을 함께하려다 결국 그러지 못하는 이야기가 영화의 줄거리다. 연출의도에서 윤성호는 "기본적을 '몸'에 대해 묘사하기보다는 그걸 핑계로 곤두선 '신경계'를 늘어놓는다"⁴⁾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 윤성호 초기작을 관통하는 연출론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사건 혹은 대상에 관해 직접 묘사하고 자세한 플롯을 지닌 극으로 풀어내는 대신, 끝없이 “삼천포”로 빠지며 그것과 연계되는 이미지를 풀어 놓는다. 어떠한 영화적 야욕을 찾아볼 수 없는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동정인 남녀가 우연한 인연을 계기로 섹스를 하냐 마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상황 자체다. 이를테면 주인공 구보의 친구인 (윤성호가 직접 연기한) 재석은 섹스 상대를 찾는 것보단 혼자 처리하는 게 낫다며 에로영화와 포르노에 관한 썰을 늘어놓는다. 섹스에 관해 고민하던 시목 주변 친구들은 갑자기 짧은 대화만으로 혈액형을 맞추는 게임을 벌이더니 ‘징기스칸’ 노래에 맞춰 군무를 춘다.
이는 영화의 중심 혹은 주제라 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한 선택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의 중심이라는 것이 무력화되고, 모종의 탈중앙화라 할 수 있는 사태가 영화의 전면에 나타난다. 네 겹의 꿈으로 구성된 <중산층 가정의 대재앙>(2002)에서 각각의 꿈은 뒤섞여 제시된다. 꿈속의 꿈 속의 꿈 속의 꿈이라는 다분히 복잡한 설정은 사실 영화의 외피로서 기능을 하지 못한다. 누군가의 꿈 속이라는 설정이 만들어낼 법한 위계는 존재하지 않고, 일본어/영어 회화 테이프에서 음성을 따온 뒤 전혀 다른 의미의 자막을 달아 완성한 내레이션(?)은 영화 속 이미지들의 무의미함을 내적으로 폭로하는 장치가 된다. 다시 말해, 영화제작이라는 관습법은 윤성호의 초기작에서 통용되지 못한다. 이는 전작의 이미지를 재활용하거나 홍콩 TV 시리즈 <의천도룡기>(1986)과 <신조협려>(1983)의 자막과 음악을 덧붙여 사용하는 <나는 내가 의천검을 쥔 것처럼>, TV 뉴스부터 CF, 예능까지 폭넓게 인용하며 본래 맥락에서 떼어내는 <산만한 제국>(2003), 자신이 담긴 사진과 영상들을 재구성한 <우익청년 윤성호>(2004) 등 그의 초기작 전체를 통틀어 통용되는 말이다. “예술적 상상력과 의미의 담지자로서의 작가 자신을 전방위적인 농담의 전략을 통해 스스로 해체”하는 “일종의 다큐-픽션”⁵⁾과 같은 평가는 여기에 기인한다.
<나는 내가 의천검을 쥔 것처럼>(2004)
<산만한 제국>(2003)
<우익청년 윤성호>(2004)
수많은 이미지를 인용(때로는 자기-인용)하는 것은 일종의 전용이다. 여기서 윤성호가 전용하는 것은 독립영화라는 상황 자체다. 1995년부터 2002년 사이의 독립영화를 잠시 살펴보자. 문민정부의 등장과 IMF로 인해 학생운동은 막을 내렸고, 소형영화/민중영화/작은 영화 등의 운동 또한 동력을 잃었다. 한편으로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인디포럼, 한국독립영화협회, 인디다큐페스티발, 서울독립영화제, 서울아트시네마, 미디액트 등이 차례로 등장했다. 학교, 영화제, 협회, 미디어센터 등 독립영화를 다루는 공공의 영역이 등장하던 시기에 윤성호는 학부를 졸업하고 영화 연출을 시작했다. 민중영화, 작은 영화 등의 다른 명칭을 벗어나 독립영화라는 단일한 명사로 합쳐지고, 독립영화 제작에 대한 공적 지원이 시작된 것이 이 시기다.⁶⁾ 2001년 인디포럼 슬로건 “영토확장”이 독립영화의 액티비즘, 애니메이션, 실험, 극영화, 장르영화를 포괄하는 다변화와 양적 성장을 대변한다. 이는 “꽃순이, 칼을 들다”라는 2002년 인디포럼 슬로건과 장르화를 내세운 미쟝센단편영화제 출범을 통해 엿볼 수 있는, 독립영화의 영토에 대한 구획과 확장이 동시에 진행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1997~2003)과 같은 대안적 영화제를 통해 윤성호를 비롯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함과 동시에, “기술적 완성도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수상경력을 얻으려는 작품”⁷⁾이 점차 늘어나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윤성호, 곡사 형제, 최진성, 김동명 등이 자신이 연관되지 않은 영화제를 찾아 좌판을 깔고 자신의 작품이 담긴 비디오를 ‘강매’했다던 “후보단일화대소동” 팀의 활동과 같은 것은 그러한 순간에서 가능했다. 윤성호 감독은 당시를 “제가 딱 약간 제일 좋았던 시기에 들어왔던 것 같아요. 인디포럼도,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도, 한독협도. … 심지어 저는 들어갔더니 미디액트가 생기는 거예요. 영화제에서는 영화 다 틀어주는 거고 미디액트에서는 장비 다 빌려주는 거고.”⁸⁾ 독립영화에 관한 공공 영역의 발생(혹은 독립영화의 제도화)라고 할 수 있는 사건들이 윤성호의 데뷔를 전후해 이뤄졌고, 윤성호는 개방된 독립영화의 영토로 향했다. 이 시기 그의 작업들은 그렇게 열린, 공공영역으로써의 독립영화라는 영토 위에서의 유희다. 이 시기 윤성호와 그의 동료 독립영화인들을 두고 “유희적 모더니즘 세대”⁹⁾ 혹은 “새로운 영화적 공기”¹⁰⁾ 등으로 평가된다. 운동을 목적 삼는 리얼리즘 영화와 충무로 진출을 노리는 장르 영화 사이에서 운동권도 영화과 학생도 아닌 사람의 작품이 지닌 영화적 활력은, 스스로 “영화적인 것은 아니고, 사실 UCC인데요.”라고 자평하는 “고집이나 신념이 나 미적인 가치관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만들 줄 아는 방식이 그것밖에 없었”¹¹⁾던 상황의 결과물이다.
윤성호의 초기작은 변화하는 매체환경의 과도기적 상황에서 “열정을 자기가 가진 범위 내에서 극대화하는” 방식의 아마추어리즘¹²⁾을 추구한다. 영화감독 대신 VJ라 불리길 바란다던 말은 이 상황의 반영과도 같다. 독립영화라는 공간은 열렸지만, 독립영화라는 이름 자체는 (적어도 당시의 윤성호에게는) 열리지 않았던 것 같다. 때문에 그가 택한 방식, 독립영화로 불리는 영상물을 제작하지만 스스로 독립영화라 부르지 않는 것은 “독립영화”라는 명명에 대한 전용이다. 윤성호가 그런 것을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영화과 학생도 운동권도 아닌 그의 위치는 충무로라는 헤게모니와 운동이라는 이데올로기 모두에 속하지 않은 자율적인 주체로 자리 잡는다. <나는 내가 의천검을 쥔 것처럼>은 그러한 지점에서 흥미롭다. <중산층 가정의 대재앙>과 <산만한 제국>의 계급과 자본 비판이 독립영화의 사회적인 것을 유지하고 있다면, 이 영화는 독립영화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공공영역 중 하나가 폐허로 변했을 때의 심정을 담아내고 있다. 2002년 11월 말 문을 열고 2003년 12월 말 문을 닫은 활력연구소는 윤성호를 비롯한 아마추어 감독들은 물론, 충무로에 진출한 감독과 기성 독립영화인, 일반 시민이 뒤섞일 수 있는 장소였다. 윤성호는 이곳의 폐관을 두고 “가장 먼저 관의 협조를 이끌어냈고, 가장 먼저 관의 협조와 동맹을 맺었고 가장 먼저 버려졌기 때문에, 그러니까 가장 처음 나온 폐허”¹³⁾라고 말했다. <나는 내가 의천검을 쥔 것처럼>은 "아낌없이 내주기만 했던 공공 영역의 실종을 첫사랑을 지키지 못한 회한으로"¹⁴⁾ 풀어낸다. 그의 다른 “비디오 저널리즘” 작업이 그러하듯 이 영화 또한 개인적인 이야기와 사회적인 이야기가 뒤섞여 있고, 다른 영화, TV드라마, 시, 음악 등이 어지럽게 인용된다. 그렇게 이 영화는 스스로 영화감독이라 불리길 꺼리던 그가 독립영화라는 공공에서 받은 수혜에 관해 풀어낸 것이 된다. 그럼으로써 윤성호의 영화는 독립영화가 놓인 상황 자체에 대한 비의도적인 전용이 된다.
매체의 변화라는 과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