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 03월 《마테리알》 편집부에 새로 합류했다. 알다시피 당장의 영화 비평 넓게는 문화 전반은 채산성이 가장 낮은 분과고, 제도의 중심과 엮어있지 않은—겨냥하면 겨냥했지—비평지에 합류한다는 건 후일의 환전도 기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왜 합류했을까? ‘스루패스로서의 비평’이라는 슬로건에, 아니 그냥 ‘스루패스’라는 말에 끌렸기 때문이다.

https://youtu.be/iAn-J8_xUG8

나는 오직 스루패스 때문에 축구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본 아스날의 경기에서 파브레가스의 패스를 보고 완전히 반해버린 것이다. 높이 그리고 멀리 가는 공의 궤적을 따라 카메라가 움직이면 상대편 수비의 진용이 보이고, 그것의 약점이 노출되고, 공이 땅바닥에 닿기도 전에 애초의 진용은 모두 흐트러져 버린다. 포메이션이 보이자마자 포메이션이 흐트러지고, 한 번 약점이 드러난 포메이션은 불안감을 갖게 된다. 얼마나 많은 유동성인지! 그러나 위 영상에서 보다시피(사실 좀 웃기기까지 한데) 그때 아스날의 공격진은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좋은 패스가 저렇게 들어가는데도, 드럽게도 골을 못 넣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래도 아스날을 계속 좋아했는데 그건 이기는 게 나한테 별로 재밌는 게 아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영화문화에서 《마테리알》 등 대안이라고 묶을 수 있었던 매체와 블로그스피어(blogsphere)가 부글부글 대기 시작했던 것은 2019년 정도였던 것 같다. 그때 무수히 많은 적대감 냉소 환멸이 있었지만 그것은 부정적 감정이라기보다, 유동성을 요구하는 의지적 정서였다. 경색된 담론이 긍정성을 포섭했기 때문에 그러한 정서를 경유하지 않는 한 무언가 불가능해보였던 그런 느낌을, 나는 받았었다. 물론 이제 그 시기는 한풀 지나갔다. 그들 그리고 나 역시 일정한 제도를 나눠받았거나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각자에게도 문화 전체에도 긍정적인 일이다. 그러나 사후적으로 우리가 일으킨 유동성은 제도로 입장하기 위한 모종의 입장료처럼 비칠지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 《마테리알》은 역사를 되돌아보기로 했다. 어떤 유동성이 있었고, 그 유동성이 어떻게 경색되어갔는지를 함께 연구해보고자 했다. 그리고 실현되지 못한 과거가 저장하고 있는 잠재성을 유동성을 위한 자원으로 언제든 전환시킬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보자고 했다. 전술교본? 보다는 체계를 쌓지 않기 위한 참고서.

그래서 우리는 십만원비디오페스티벌을 시작점으로 삼기로 했다. 우리 《마테리알》은 최근의 독립영화가 꽤 따분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런 감각의 배경을 구체화할 수 있었던 계기는 최근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김동령, 박경태, 2019)의 Notion 페이지를 통해 공개된 김신재 큐레이터·김동령, 박경태 감독의 대담 「아웃테이크 시리즈였다. 「아웃테이크 03」에서 박경태 감독은 독립영화가 영화제를 목표로 하는 형식적 과정만 남았고, “과거처럼 ‘독립영화’라는 문화적 현상이나 욕구는 사라지고, 독립예술 영화, 다양성 영화라는 이름으로 행정을 위한 이름만 남게 되는 거죠. 이런 상황에서 대안적인 형태의 상영이라든가 배급은 자리를 잡을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 자체로 시장에서의 순환을 기대할 수 없는 독립영화는 결국, 수상이라는 커리어를 축장하고자 하거나, 상업영화 감독으로 채택되기를 간청할 수밖에 없는 영토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 독립영화가 꽤 따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런 느낌 속에서, 우리는 ‘십만원비디오페스티벌’을 발견했다. “돈이 없다, 이런 시나리오엔 제작자가 나서지 않는다, 대학에서 영화를 배운 적이 없다, 유학파도 아니다, 충무로 경험도 없다…. 이런 건 핑계가 되지 않는다. 집에 있는 것이든, 친구 것이든 비디오카메라 하나만 구하면 족하다. 촬영 스태프와 배우는 자신을 포함, 가족이든 친구든 무보수. 예산은 밥값과 비디오테이프 값, 10만원이면 족하다. 그래서 영화제를 연다.”¹⁾ 1997년 06월 최소원은 이런 이유로 ‘나도 감독 영화제’를 열었고, 3개월 후 ‘십만원비디오영화제’로 개칭했다.

최소원은 십만원비디오영화제의 정신, 곧 아마추어리즘으로서 “십만원 정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적 있다. “기술적으로 만약 좀 떨어진다손 치더라도 독창성과 실험정신이 살아있다면 우리는 그 작품을 아마추어리즘의 범주에 넣으며, 진정한 아마추어는 거기서 어떻게 질을 더 향상시킬까를 고민하고 치열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다.”²⁾

1997년 06월 시작한 십만원비디오영화제는 2004년 03월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십만원비디오영화제 사무국 ‘꿈꾸미’가 주축이 되어 기획·운영한 활력연구소의 폐관과 함께였다. 재정적 이유는 서울시가 십만원비디오영화제의 ‘하드웨어’로 기획된 활력연구소에 대한 지원을 취소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과 여파는 십만원비디오영화제·활력연구소와 가깝게 활동했던 윤성호 감독의 <나는 내가 의천검을 쥔 것처럼>(2004)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처음 열었을 때의 초심과 달리 나아갔다는 점이다. 초반에는 일반인들이 자신의 예술적 감수성을 어수룩한 기술적 완성도에 담는 작품이 많았는데, 갈수록 기술적 완성도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수상경력을 얻으려는 작품이 늘어났다. 그러다보니 영화제를 운영하는 우리 자신의 재미가 없어졌다. (중략) 우리는 기술의 발전이 상상력의 경계를 넓혀주리라 생각했다.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영화는 상투적이 돼갔고, 디지털의 상상력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적은 예산으로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은 좋아졌는데, 재미가 없어졌다니 역설적이다.³⁾

더 중요한 이유는 최소원을 포함한 ‘꿈꾸미’들에게 십만원비디오영화제가 재미가 없어졌다는 데 있다. 기술이 발전하자 영화는 더욱 상투적이 되어갔다고, 기술적 완성도가 예술적 감수성을 초과하는 현상이 발생했고, 경력을 얻으려는 작품이 늘어났다고 최소원은 말했다. 목적지로서 아마추어리즘이 아니라, 십만원비디오영화제를 경유해 프로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90년대 작은영화, 민족영화 등을 흡수해 탄생한 ‘독립영화’가 ‘포트폴리오용 영화’로 전락하기 전, 그 사이에 ‘아마추어리즘’을 반짝 시도했던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활력 찾기’라는 이름으로 십만원비디오페스티벌·활력연구소의 플레이어들에 대한 (비정기) 케이스 스터디를 시작한 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