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스드’의 발명과 적용, 그리고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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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28일, “당신이 여기에 있다면 이미 너무 늦은 거겠죠 / 이것이 전부입니다”라는 설명과 “저주를 내려 보세요 (Inflict a curse)”가 달린 게시링크가 붙은 텀블러 블로그가 첫 이미지를 올린다: “이 이미지는 저주받았다 (This image is cursed)”라는 첨언과 함께. 하지만 업로드 된 이미지는 지난 시기처럼 갑자기 튀어나오는 귀신이나 갈기갈기 찢긴 시체와 같은 충격적인 대상을 담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단지 사방이 나무 벽으로 쳐진 실내 공간에서 청색 상하의를 입은 노년의 백인 남성이 허술하게 진열된 수많은 토마토 상자 사이에 어설프게 서있을 뿐이었다. “커스드 이미지 (cursed image)”라는 간명한 블로그명에서 출발한 이 어정쩡한 분류가 이후의 인터넷에서 어떻게 사용되어왔는지 떠올리면, 저주 받은 이미지들의 시작은 예상보다 참으로 소박한 편이다. 물론 그러한 이미지들이 2010년대 중후반의 온라인 호러에 걸었던 저주는 크리피파스타의 그것만큼 효과적이었겠지만.

범용기계로서의 컴퓨터가 동떨어진 채 제각기 발전되던 매체기술을 하나로 결합했듯, 그를 위한 네트워크로 기능하는 인터넷이 통합된 망으로서 과거의 매체를 통해 생산된 작업물들을 모조리 하나의 정보로 변환하여 기록·저장하는 시공이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므로 인터넷에서 출처와 유래를 전혀 알 수 없는 오래된 사진과 영상이 가늠할 수 없는 수량으로 떠돌아다니는 것도 요상한 일은 아니고 말이다. 무한한 용량을 가장하는 과거의 저수지가 골목마다 대차게 자리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에 입주해 어느 순간 개인정보를 비롯한 지대를 요구하는 거대 플랫폼들은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현재성만을 전면에 내세우기 위해 갖은 애를 써왔다. 오로지 한정적인 간택을 받고 안전하게 후처리되어 솟아오르는 몇몇 “과거”들을 빼자면, 아카이브 어딘가에 묻혀서 낡아버리거나 기본적으로 닳아있는 사진·영상과 웹페이지는, 거기에 묻어있는 과거의 흔적만으로도 충분히 유령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 번, 00년대는 규제받지 않은 유통망에서 길어오거나 자체적인 변형을 입혀 직접적인 충격파를 날리는 이미지들을 쇼크, 어쩌면 “호러”의 수단으로 삼으며 그 악명을 만들어갔다. 말 그대로 스너프를 처발랐던 이미지 속의 대상과 상황을 언급하거나(‘고어 짤’) 그런 이미지를 마주할 때 즉각적으로 생겨나는 정동을 덧붙이는 (‘혐짤’, ‘쇼크 사이트’) 명명법이나, 영어권에서는 보다 폭넓게 적용 가능한 “안전하지 않다 (Not Safe For~)”는 주의사항까지 덧붙여진 이유는, 암지에서 유통되기 위해서는 결국에 이미지에 둘둘 경고문과 완충제를 두를 수밖에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혐짤들이 지뢰밭처럼 묻혀있는 채 불시의 습격을 꾀할 수는 있어도, 소셜 미디어뿐만 아니라 유튜브나 이매저(imgur) 같은 아카이브/호스트 사이트의 규제된 흐름 속에서 그만치 번성하지 못했던 것은 더욱 깐깐해지고 모질어진 규제들에 대폭 걸릴 만큼 너무 직접적이었고, 애초에 그런 충격파 자체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은 짧고 굵은 단타에 불과했기 때문일 테다. 그건 사막 한가운데에 날카로운 돌덩이를 던져놓거나 태평양 수면에 자그마한 핏방울을 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에 비해 ‘커스드’라는 낱말 자체부터가 주는 모호함은 사뭇 달라 보인다. 단지 “저주 받았다”는 수식어만으로는 이 이미지들이 정확히 무엇을 담고 있거나 어떠한 감정이 들지를 가늠할 수가 없으니까. 그러한 이미지 속에 그나마 담긴 대상들은 소 모양의 텔레비전 걸이가 걸린 낡은 실내일수도 있고, 양복을 입고 흰 망토를 두른 채 거대한 빵을 들고 있는 세 명의 남성일수도 있으며, 옥색 물의 계곡에서 수영 중인 사람들을 찍은 2002년 7월 1일의 사진일수도 있다. 더불어 크리피파스타처럼 변조된 특정 이미지들에 로어화 장치를 부착해 가동시킬 수 있을만한 뚜렷한 “캐릭터성”도 없었기에, 커스드 이미지의 대상들은 <어스바운드>와 같은 기이한 RPG 게임에서 마주할 수 있는 잡몹 정도로 다뤄지거나 밈-음악에 맞춘 컴필레이션처럼 빠르게 나열하는 것 정도가 고작이었다. 오히려 최초의 이미지에 가까워질수록, 커스드 이미지는 상대적으로 더 멀쩡하며 심지어 일반적으로 보이는 경우들이 다분하다. 다르게 말하자면, 사뭇 평범한 일상성을 지니고 있는 커스드 이미지는 적어도 웹상에서 즉시 규제되거나 플랫폼에서 쫓겨날 만큼의 위반적인 직접성을 갖고 있지 않았고, 고로 거대한 한 방의 충격파로 응축된 힘을 조금 더 느슨하게 풀어 그 저주를 훨씬 더 광범위하게 적용해, 사막의 지표면을 훑는 안개바람이나 바다로 흘러들어오는 어딘가의 민물처럼 이를 퍼뜨려나갈 수 있었다. 심지어 규제 기준의 한계치까지 닿은 혐짤과 큰 차이가 없는 경우일지라도, 커스드 이미지는 2000년대보다 더욱 제한된 플랫폼들의 한계선 안쪽에서부터 으스스함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정확히 어떠한 방식으로?

혐짤들이 폭탄처럼 충격을 내장하고 있던 것에 비해, 커스드 이미지의 기이한 성정은 안쪽에서 나타나기보다는 바깥쪽에서 부여된다. 누가 어느 때 어느 곳의 어떠한 상황에서 촬영했는지 모를 이미지 자체에 “저주 받았다”는 저주를 내리고서야, 그 이미지는 ‘커스드’한 것이 되며, 해당 이미지들이 해당 상황에서 실제로 기괴했건 말건, 웹상에서 사후적으로 부여되는 저주 자체가 그 기이함의 수치를 저절로 증폭시킨다. 최초의 텀블러 블로그의 제작자가 이 저주행위에 대해 밝혔듯: “거기엔 본래부터 불안하게 하는 점이 어느 부분에도 없어요. 완전 평범하기 그지없는 순간이 카메라와 제가 준 새로운 맥락을 통해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변형된 거죠. (there's nothing inherently unsettling about any part of it. It's a totally mundane moment transformed into something else by the camera and the new context I've given it.)” 기나길었던 크리피파스타들처럼 구구절절하게 뒷배경을 설명할 필요 따위 없이 이 이미지가 저주받았다는 딱 한 단어로만으로도, 상황만 잘 맞아 떨어진다면 기이한 맥락이 순식간에 추출돼 이미지의 겉면을 뒷면 없이도 덮어버릴 수가 있다. 허공에 유희왕 카드를 휘날리거나 얼음 호수에 들어가 <솔리테어>가 실행되는 컴퓨터 모니터를 들어 올리거나, 빤스 한 장만 입은 남성 뒤편으로 번개가 떨어지는 순간을 포착하는 등 자칫 우스워 보일 수 있는 장면들에도, ‘커스드’라는 단어가 붙어 새로워진 맥락에는 알 수 없는 기이함을 길어 올릴 가능성이 심어진다. 그러므로 이미지에서 정확히 무엇이 ‘저주’받았는지나, 혹은 어쩌다가 이 이미지가 ‘저주받게’ 되었는지에 대한 뒷면은 필요치 않아진다. ‘커스드’가 확정된 순간 이미지의 바깥에서부터 날아온 저주가 그 안쪽을 파고들어가니까. 그러므로 온라인상에서 아무나 혐짤 지뢰를 매장할 수 있었듯, 잘만 하면 누구나 이미지에 저주를 부여할 수가 있었고, 다시금 중요치 않아진 원 촬영자의 존재는 잘려나간 채로, 이미지에 주박을 내릴 수 있는 다수의 익명이 그 힘을 상속받는다.

그렇다면 쇼크 사이트와 혐짤의 충격파를 이야기의 힘으로 상쇄했던 크리피파스타와 ARG, 그리고 로어의 시대를 재방문해 각 영역의 기예를 비교할 수 있을 테다. 설명되지 않은 ‘겉면’의 빈틈을 빼곡하게 채우기 위해 텍스트로 이뤄진 뒷이야기를 부가하고, 이를 온갖 단서들이 정리된 도표의 형태로 말이 되게 정리했던 로어화의 공정 전체가, 한 바퀴를 빙 돌아 저주받았다는 단어, 딱 하나의 수식어가 형성하는 “맥락” 그 자체에 내장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토끼 굴과 빙산처럼 겉면보다 거대한 뒷면, 바깥보다 더 큰 안쪽을 건축하거나 전제하는 이전 시기의 수법은 이제 저주의 맥락으로만 압축되어 거추장스러운 장식과 무게를 줄이고, 가속된 유통망 속에서 더욱 효율적으로 전파된다. ‘커스드’라는 개념이 해당 텀블러 블로그에서 발명된 이후, 곧장 트위터의 여러 이미지 매크로 계정과 같은 용기를 타고 제각기 다른 저주를 받은 이미지들이 수많은 소셜 미디어의 지류에서 떠돌아다니기 시작한다. 커뮤니티 플랫폼들에는 새로이 등장한 개념을 위해 그 중에서도 특히나 드물고 귀한 짤들을 수집할 수 있는 포럼들이 개설되며, 동영상 플랫폼의 유저들은 그 형식에 맞춰 이 이미지들을 사후적인 컴필레이션으로 편찬하고, 이 사이사이를 넘나드는 수많은 유저들이 아카이브를 파내 저주를 흩뿌린다. 로어화의 기술이 플랫폼이 본격적으로 정립되던 2010년대 초중반에 벼려졌던 만큼, 이제는 훨씬 더 전문화되고 분업화된 밈화의 공정이 ‘커스드’의 개념을 웹 전역에 효과적으로 퍼뜨린다. 그러한 단어들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떠돌아다녔던 이상야릇한 “엽기” 이미지들은 이 새로운 개념에 따라 저주받은 것으로 재분류되고, 밈 재생산 장치로서 인터넷은 확실한 저주의 매개체가 되어 커스드의 개념을 확연하게 보편화시키는 한편 차차 더 강렬하게 증폭시킨다. 최초로 저주가 선언된 이미지만큼 여전히 묘하게 일상적인 이미지들이 깊숙한 아카이브에서부터 건져지긴 하지만, 증폭작용에 의해 2000년대의 그것과 별다르지 않은 기괴하고 섬뜩한 짤들이 안정화된 개념의 틈을 타 저주의 주도권을 가져간다. 그렇게 마련된 커스드의 (때로는 그 대응항으로 설정된 ‘블레스드 (blessed)’까지 넓어지다 못해 ‘블럴스드 (blurssed)’로 뒤섞여버리는) 스펙트럼 속에서, 저주 받은 이미지들이 인터넷에 나타난다. 습격하고 강타하거나, 설명하고 분석하지 않고, 현현하고 출몰하면서.

이 저주가 특히나 강력하게 적용될 수 있었던 건 커스드 이미지들이 특정한 대상이나 상황과 결부되기보다는 사후적인 맥락화의 과정에서 생겨났으며, 이 ‘맥락화’는 무엇보다도 웹을 떠돌아다니는 오래된 사진이라는 형식에 가장 강력하게 들러붙었기 때문일 테다. 최초의 텀블러 블로거가 말했던 “당신에게 실제로 일어난 적 없는 기억의 이미지이지만, 그것을 보는 순간, 갑작스럽게 당신에게 일어나는 겁니다. (They're images of memories that never actually happened to you, but the moment you see them, it's suddenly happening to you)”라는 언급은, 다시 한 번 온라인 호러가 노스탤지어에 침투해 이를 기이함으로 잠식하는 과정과 연결될 수도 있겠다. 저화질이 안겨주는 불분명함은 애매하게 흐려진 기억의 연상 작용을 촉진시키는 만큼, 기억과 과거, 그리고 시간의 불안정함을 증폭시키는 데에도 값지게 기여하니까. 그러므로, 로어화를 통해 “떠올려보니 이상했던 것”으로 사후적이게 오염되곤 했던 과거의 기억은 이제 커스드 이미지에 내려지는 저주, 그리고 저주로써의 커스드 이미지를 통해 “애초부터 기이했던 것”으로 뒤바뀐다. 이것이 어쩌면 커스드라는 저주에 내재된 강력한 맥락들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저주” 자체의 뜻에서부터 어떠한 설명 불가함이 내재됐듯, 커스드 이미지에 해당 이미지가 촬영된 경위가 드물게 설명되거나, 제작된 뒷이야기가 덧붙여지더라도 이는 로어화된 크리피파스타들만큼의 힘을 내지 못한다. 오히려, 커스드 이미지는 그 어떤 설명 없이 저주 받았다는 맥락 없는 맥락만이 간편하게 부착되었을 때야 가장 큰 힘을 낼 수가 있다.

때문에 10년 정도 동안의 궤도를 크게 돌아 온라인 호러가 다시 이미지의 공포로 복귀한 듯 보일 수도 있겠지만, 커스드 이미지는 지난 시기의 충격파와 로어화를 몽땅 “저주”에 내장시켜 양쪽을 간명하게 종합해, 앞으로 다가올 시기의 온라인 호러를 위한 새로운 도구가 된다. 2010년대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도피적이었거나 심지어는 아직도 조금이나마 대안적인, 현실에서 살짝 어긋난 공간처럼 보였지만 어느새 맞춤형 광고들을 뒤덮고 끝없는 컨텐츠를 제공하는 알고리즘에 귀속된 초대형 플랫폼에게 뒤덮혀,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구동하는 현실 그 자체가 되어버린 인터넷을 새로운 무대로 삼아서. 그런 만큼 커스드 이미지의 저주에서부터 재시작된 2010년대 후반의 온라인 호러에 대한 그럴싸한 설명은 이 시리즈가 앞두고 있듯 더욱이나 까다로워질 것이다. 커스드의 개념이 개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러한 단어 없이도 온갖 저주들이 인터넷의 여러 시공에서 일어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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